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권력과 순응의 미묘한 심리학

 

 

권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집단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신의 양심과 타협하는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러한 질문들을 놀라운 심리적 통찰력으로 파헤친 작품이다. 소설은 1960년대 한국의 작은 초등학교 교실이라는 미시적 공간을 통해 권력의 탄생과 유지,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굴종과 저항의 역학을 보여준다.

 

이문열 중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책 앞표지
1960년대 초등학교 교실을 통해 엿본 권력에 대한 욕망과 실체

 

 

교실 속 독재자, 엄석대

소설의 중심에는 엄석대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단순한 반장이 아니라 교실의 '왕'이다. 엄석대는 뛰어난 성적과 체격, 그리고 교사의 신임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한다. 그의 통치는 공포와 보상의 교묘한 균형 위에 서 있다. 아이들은 엄석대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고, 반항하면 따돌림이나 체벌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엄석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그는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거나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집단의 규범을 만들고 이를 위반하는 학생들에게 납득할 수 없는 처벌을 내린다.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주인공 '나'(한병태)는 이러한 권력 구조에 처음에는 반항한다. 반장의 호출에도, 물 당번에도 번번이 거부하면서 자존심 대결을 펼친다. 그와 양립하면서 대결을 펼치지만 담임선생님도 아이들도 가족들까지 모두가 엄석대를 옹호한다. 그런 점을 한병태는 견딜 수 없었지만 결국 대결에서 패배를 뜻하는 눈물과 함께 그의 권력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점차 순응하게 된다. 그의 내면에는 저항의 욕구와 순응의 편안함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이 갈등은 우리 모두가 권위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보편적인 딜레마를 반영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병태가 엄석대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느끼는 안도감과 죄책감의 미묘한 표현이다. 이문열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타협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한병태는 처음에는 자신의 순응을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점차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현대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와의 연관성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묘사하는 교실 속 권력구조와 그에 대한 반응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심화된 정치적 양극화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2025년 현재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깊이 분열되어 있으며, 이 분열은 단순한 이념적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진실'을 가진 평행 세계처럼 작동하고 있다.
현대 한국에서 정치적 진영은 마치 소설 속 엄석대의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처럼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각 진영은 자신들만의 언어, 뉴스 소스, 역사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교실에서 엄석대가 만들어낸 '우리'와 '그들'의 구분과 닮아있다. 양 진영 사이의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상대 진영의 견해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상대 진영의 네거티브와 자신의 진영 내에서 더욱 극단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정치적 양극화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스 소비, 주거지 선택, 심지어 교우 관계까지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는 소설에서 엄석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 역학과 유사하다. 그때도 아이들은 엄석대에 대한 태도에 따라 '우리 편'과 '저쪽 편'으로 나뉘었고, 이 구분은 학교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양극화 시대의 순응과 저항

현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한병태와 비슷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의견에 동조해야 한다는 암묵적 압력을 느끼는 것이다. 진영 내에서 다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 엄석대에게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양극화된 정치 환경에서 '중도'라는 입장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는 소설에서 엄석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학생들이 결국은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과 유사하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도 '중도'는 종종 우유부단함이나 무관심으로 해석되며, 정치적 담론에서 소외되고 만다.
또한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맞춤식 콘텐츠는 사람들이 이미 동의하는 의견만 접하게 만들며, 이는 소설 속에서 엄석대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법이다.

 


성인이 된 한병태의 회상과 현대 한국의 자기 성찰

소설에서 성인이 된 한병태는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순응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은, 현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병태와 같은 자기반성의 태도일지 모른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논의는 종종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자신의 진영을 무조건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이 보여주듯, 권력 구조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저항은 단순한 적대감보다 더 깊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성인이 된 한병태는 자신의 과거 행동을 돌아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듯, 현대 한국 사회도 단순한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성숙한 정치 문화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부패하는 영웅과 정치 지도자의 변화

소설의 제목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엄석대를 향한 복합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엄석대는 전형적인 악당이 아니라 '일그러진 영웅'이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통해 반의 질서를 유지하고 때로는 학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 볼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변화 과정과 유사하다. 많은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만,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이상은 희석되고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보아온 한국의 정치는 그랬었다. 그리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은 이러한 변질을 더욱 가속화한다. 지지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발언을 하거나, 상대 진영을 더욱 강하게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서 엄석대의 권력이 교사의 묵인과 방관 속에서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 기성 언론, 지식인, 시민사회가 때로는 정치적 양극화를 방관하거나 심지어 조장함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키는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분열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비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결국 깨어있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성인이 된 한병태는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반성함으로써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이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 언제나 쉽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불의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극화된 한국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 않고 깨어있는 시민의식이다. 정치적 담론은 '우리 VS 그들'의 구도를 넘어서 공동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문열의 소설이 보여주듯, 권력 구조는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암묵적 동의와 순응을 통해 유지된다. 그렇다면 정치적 양극화 역시 우리 모두가 깨어있는 시민의식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비로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과 방관과는 다른 선택이다. 교실 속 작은 사회가 한 명의 비협조적인 전학생(한병태)에 의해 균열이 생기고 결국 변화했듯이, 현대 한국 사회도 진영 논리에 저항하는 개인들의 용기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단순한 성장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선택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진실을 직시할 용기를 준다. 양극화된 한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우리편'과 '그들'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일지도 모른다.